작성일 : 10-08-23 19:02
[중앙SUNDAY_Opinion|] 폭력 영화가 만들어낼 '괴물 사회'
 글쓴이 : 더코칭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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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영화가 만들어낼 ‘괴물 사회’

 

정미홍 방송인·더코칭그룹 대표 | 제180호 | 중앙SUNDAY

며칠 전부터 중학교 1학년인 딸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 밤에 무섭다며 혼자서는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별 수 없이 남편과 교대로 아이 손을 꼭 잡고 잠들 때까지 지켜보는 상황이 밤마다 연출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며칠 전 가족이 함께 영화관에 갔을 때였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3D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갔는데, 본 영화 시작 전에 보게 된 다른 영화의 예고편이 화근이었다.

최근 상영제한등급 적용으로 논란이 있었던 바로 그 영화. 미처 눈 돌릴 새도 없이 피로 얼룩진 주인공의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면서, 이를 악물고 흉기를 휘둘러 사방에 피가 튀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때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내 무릎에 파묻었고, 나도 그 화면이 역겨워 바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 단위 관람객이 대부분이었던 극장 안에서는 여기저기서 ‘엄마야’ ‘아이구!’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잠시 후 기다리던 영화가 시작됐고, 우리는 바로 재미있는 스토리와 영상에 몰두했다. 충격적인 영화 예고편은 그것으로 잊힌 줄 알았는데, 바로 그날 저녁부터 아이의 불면증이 시작된 것이다. 평소에 유난히 감성적인 아이여서 갑자기 맞닥뜨린 잔혹한 장면들은 꽤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 저장됐을 무서운 잔상을 지워 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기억된 정보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의식에서는 사라질 수 있지만,

무의식에서까지 삭제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이는 나중에 혹시 어둡고 폐쇄된 공간에 있게 될 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거나 붉은색이나 날이 선 연장들을 보면 소스라치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폐쇄공포증과 같은 증상도 언젠가 특정한 상황에서 경험했던 부정적인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 일으키는 부작용인 경우가 많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어린이들이 많은 애니메이션 상영관에서 끔찍한 영화의 예고편을 거침없이 내보낸 영화관 측의 무신경에 새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일본에는 소위 오타쿠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있다. 원래는 어떤 한 분야에 몰두한 나머지 팬이나 매니어 수준을 넘어서서 전문가 못지않은 일반인을 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특정 분야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일반 상식이 결핍된 채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 없이 주로 집에만 처박혀 게임이나 만화영화에 몰두한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 일본 곳곳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며 급속히 늘고 있는 이 오타쿠족이 다름 아닌 일본 영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일본 영화의 허무주의적이며, 자기파괴적인 경향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 사이에 폐쇄적이고 우울하며 세상을 거부하는 오타쿠 문화를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극단적으로 잔인한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미래가 우려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의 허무주의 영화가 오타쿠족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 영화의 잔혹성과 폭력성 때문에 앞으로 이 사회에 어떤 괴상한 집단이 만들어질지 몹시 걱정스럽다. 혹시 남의 고통과 감정에 공감은커녕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괴물 같은 인간이나 내 만족을 위해 필요하다면 아무리 타인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를 양산하지는 않을까? 요즘 일어나는 범죄의 유형들을 보면 이것이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폭력에 자주 노출될수록 인간은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악에 대한 심판은 어떤 형태로 이뤄지든 괜찮다는 식의 사고는 사회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한 무감각적 사고의 상태로 몰고 갈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치관이다. 한 편의 난폭한 영화가 수많은 사람의 무의식에 남기는 집단적 폭력 경험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내 아이에게 잠 못 드는 밤을 선물한 문제의 영화를 만든 감독은 ‘그냥 한 남자의 슬프고 지독한 복수극, 순애보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는데, 슬프고 지독한 복수와 순애보를 보다 더 높은 의식을 가지고, 눈물 나게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과 새로운 사랑에 눈 뜨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묻고 싶다.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8511